[25.10.26]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창세기 25장27~28절)
본문
하나님의 예정 속에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22~23절). 본문은 이들이 장성한 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라는 신비는 삶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채, 에서와 야곱은 각자의 기질에 따라 살았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익숙한 사냥꾼”이 된 “들사람”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주”하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27~28절).
당시 문화의 관점에서 이삭의 장자 편애는 이해가 됩니다. 게다가 에서는 얼굴이 붉고 털도 많았습니다(25절). 이는 고대에서 영웅의 외모를 묘사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사냥꾼은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니므롯은 “하나님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었습니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 바벨에서 시작되고, 앗수르 성읍들에 이르렀습니다(창10:9~11). 즉 니므롯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에서가 유능한 사냥꾼이며 ‘들사람’이라는 것은 좋은 평가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장자의 복)’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맞바꾸었고, 헷 족속 여인들과 결혼해서 부모의 근심이 되었습니다(창26:34~35). 그는 ‘육체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집중한 사람’입니다.
한편, 야곱은 ‘장막에 거주’하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조용한 사람”(이쉬 탐)은 ‘완전한 자’란 뜻으로, 노아와 욥에게 적용된 단어입니다(창6:9, 욥1:8). 인간적으로 야곱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 “완전한 자”(이쉬 탐)는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은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은 ‘윤리적’ 개념이 아닙니다. ‘완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약속을 의심하지 말고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이 받았던 ‘복이 될지라’라는 하나님의 약속/명령을 붙잡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장자의 축복)’에 삶을 걸었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여자 아브라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삭의 아내가 되기 위해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라는 축복을 받고 고향 부모를 선뜻 떠났습니다(창24:60). 리브가는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담아두었기에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리브가와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얻고자 사용했던 방식이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리브가가 하나님의 복을 일관되게 추구했던 야곱을 사랑한 것은 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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