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26] 계명: “주님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 (요한일서 3장 23절)
본문
요한일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담대한 선언과 함께 ‘서로 사랑’하라고 힘주어 권면합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1~2절)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는 죄로 인해 뒤틀린 우리의 정체성을 올바로 세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알다’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대표적으로 3:16, 4:7~8, 등). ‘안다는 것’은 인격적인 만남에서 오는 확신으로 우리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바뀐 것을 말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23절). 이 말씀은 표면상 두 가지 계명,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도 확신하지 못하고 서로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계명은 실상 하나의 계명입니다. 3장 14절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담대히 선언합니다. 우리는 ‘형제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형제 사랑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마땅하다’(3:16, 4:11)고 강조합니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실제 행동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이 감정이고 그냥 일어나는 일이라면, 우리는 사랑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사랑하라고 명령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하기에, 가정과 교회조차 사랑의 실천이 없는 메마른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은 느낌이나 말을 넘어 우리가 행하는 일입니다(18절). 또한 사랑의 대상은 내 눈앞에 있는 실제 살과 뼈를 가진 인간입니다. 요한일서는 ‘눈에 보이는 형제’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4:20). 눈에 보이지 않는 완벽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허물 많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위해 실제로 십자가에 죽었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빚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일에 유능하길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며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21~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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